사랑의 핫초코는 꼭 식후에 드세요
       
娑曦
사랑의 핫초코는 꼭 식후에 드세요

현삐와 핫초코 관련 트윗 썰 백업

2022.08.21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김여원이 먼저 두 사람의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같이 일어나 나간 스케줄에 부엌의 싱크대에는 물로만 간단하게 씻어둔 접시가 두어개 들어있었다.

곧 돌아올 연인을 기다리며 김여원은 할 일은 헤아렸다. 청소기를 먼저 돌리고, 저녁준비를 하면 되겠다. 설거지는 어차피 저녁 먹으면 접시가 또 생기니까 이따 해야지.

두 사람의 집은 연인의 공간으로는 딱 좋았지만 혼자 있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시간이 더 늦어지기 전에 빠르게 청소기를 돌린 여자는 시간을 헤아렸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늦네.

끝나고 출발하면 전화해줘, 간략하게 문자를 남겨둔 김여원은 냉장고를 뒤적였다. 한동안 바쁘다고 대충 때웠으니 자신의 스케줄이 일찍 끝난 오늘이야말로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하는 날이었다.

뭘 먹어야 좋을지 거창한 고민을 하는데에 비해서 냉장고는 초라했다. 이건 샐러드, 저건 닭가슴살... 장 보기를 게을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냉장고가 이제 좀 닫아주오, 하고 울어댈 때까지 고민하던 김여원은 결국 달걀과 식빵, 그리고 케찹을 꺼내들었다. 요리는 내일 해야겠다. 빠른 포기였다.

김여원이 만드는 계란프라이는 항상 반숙이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달걀을 깨넣은 김여원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토스터에 식빵을 집어넣었다.

따끈한 식빵의 한면에 케찹을 바르고 프라이를 올린 다음 다른 빵으로 덮어준다. 그리고 반으로 썰고 파슬리를 뿌려준다. 여전히 아현이에게는 답신이 없어서, 빵은 냉장고에 넣었다.

이것저것 한다고 부산을 떨었는데도 시간이 가는 속도가 영 느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배는 고파서 김여원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그냥 먼저 먹을까? 하지만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는 시간은 소중했다.

그래서 김여원은 조금 더 기다리는 대신 핫초코를 마시기로 결정했다.

뜨거운 물에 가루를 녹이고 식기를 기다린다. 지루해서 틀어놓은 TV 프로그램에는 테스타가 나왔다.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까 좋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늦지 않게 끝날 것 같다는 아침인사가 무색하게 저녁시간이 한참 지난 9시에도 아현이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일정이 틀어졌나보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머그잔에 뜨거운 물이, 그리고 핫초코 가루가.

쇼파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졸고있던 김여원의 귀에 급하게 누르는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시계가 경쾌하게 오후 9시를 알렸다.

바깥의 찬 공기를 가득 묻히고 돌아온 남자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문자 했는데 답장이 없어서 걱정했잖아. 코트를 받아들어 행거에 걸었다. 매니저님 핸드폰이라도 빌려서 전화하려고 했는데 급하게 오느라 잊어버렸어... 귀여우니까 봐준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선아현을 꼭 끌어안았다.

오늘은 냉장고가 영 부실해서 요리를 못했어. 나 내일 쉬니까 장 봐올게. 뭐 먹고싶은 거 있어? 식탁의 한쪽 면에는 식빵을 먹는 선아현이, 반대쪽 면에는 식빵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조잘조잘 말 붙이기 바쁜 김여원이 있었다.

자신도 내일이 쉬는 날이라며 같이 장을 보러가자는 말에 김여원은 행복하게 웃었다가, 왜 안 먹고 있냐는 말에 놀란 토끼눈을 했다.

기다리면서 핫초코를 먹는 게 아니었는데. 어차피 조금 지나면 배가 꺼지겠지만 지금은 딱 알맞게 배가 부른 상태였다. 여기에 프라이와 식빵까지 들어가면 분명 체하겠지. 그렇다면 입맛이 없다는 거짓말을 해서 걱정을 시킬지, 군것질을 해서 배가 부르다고 실토해 걱정을 시킬지가 문제였다.

그리고 조금은 뻔한 결말로, 김여원은 핫초코 가루를 뺏겼다. 그러고는 얼마 후에 밥 먹기 전에는 먹지 마세요! 라고 예쁜 글씨로 적힌 포스트잇이 뚜껑에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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